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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연재글. 그 겨울의 탄생 #3

AzureL'ete title: 작가콘AzureL'ete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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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물론 대단한 포부와 다르게 모이는 사람들은 늘 비슷했다. 아마 당시 내가 지닌 한계가 아니었을까 한다. N석에는 새로운 사람들보다는 이전에 함께 응원했던 소모임 사람들이 늘 자리를 함께했다. 물론 그라지예와 응원 소리가 달라 안 좋은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붕이 있는 좌석에서 응원을 하면서 가변석보다 더 큰 소리가 나오다 보니 기존 서포터들과 마찰 아닌 마찰도 생겨났다. 하지만 N석과 응원에는 누가 해야만 한다는 정해진 틀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또 다양한 소리가 있어도 원정팀 응원가만 불리는 고요한 홈 경기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한 목소리를 위한 겉보기식 타협보단 더 크고 확실한 목소리를 위해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새로운 이정표로 모두를 이끌고 싶었다.

 

우리들의 응원과 함께 시작된 후반기는 기존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기억 속 대구는 경기에서나 시즌 전체에서나 늘 뒷심이 부족한 팀이었다. 하지만 2018년은 완전히 다른 양상이었다. 당연하게도 힘들 것 같던 하반기라고 생각 했건만 첫 경기부터 경기력에서 확연한 차이가 났다. 상주전과 제주전에서 연승을 달리며 생긴 파동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어느 누구도 쉽게 막을 수 없는 파죽지세였다. 어설픈 공격 일변도의 축구가 아니라 탄탄한 수비를 기반으로 한 체계적인 역습이 먹혀 들면서 어느 팀을 만나도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였다. 시즌 중반 합류한 외국인 선수들 역시 곧바로 적응을 마치고 팀 성적을 견인했다.

 

리그뿐만 아니라 FA컵에서도 예전과는 다른 흐름이 이어졌다. 4강에 이르기까지 양평, 목포를 만나는 유리한 대진 속에서 1부 리그 클럽의 위엄을 보여주던 우리는 사상 처음으로 결승에 올랐다. 광양에서 펼쳐지는 전남과의 4강 경기가 승리로 끝난 직후에도 난 이 경기의 결과가 FA컵 결승인지, 단순한 리그의 한 경기인지 체감하지 못할 만큼 얼이 빠져 있었다. 2018년으로부터 꼬박 10년전 FA컵 최고 성적 4강에 만족하며 언젠간 이루고야 말겠다던 우승컵을 향한 전진이 일보 앞으로 나아갔음에 뜨거운 감정이 솟아올랐다.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나 2부 리그라는 구덩이에서 벗어난 우리가 늘 주위에서 부러워하며 지켜만 보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결승에 오른 순간 이정도면 됐다는 만족보단 끝을 봐야만 겠다는 욕심이 더 컸다. 지금이 아니면 우리에게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고 우리를 과소평가했기에 오히려 더 강한 승부욕이 생겨났다.

 

대구가 이 정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과 더불어 그 사실을 목도하면서 예상치 못하게 들어선 설레임과 너무 큰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에 느낄 상실에 대한 걱정이 마음 속에 혼재해 어지러웠다. 꿈꾸지 못한 결승을 맞이하며 그 누구보다 이기고 싶지만 처음 맞이하는 우승 앞에 늘 한발치를 앞에 둔 채 실패만 거듭했던 우리가 과연 이번에는 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이 찾아왔다. 2012년 상위 스플릿 진출을 목전에 두었던 서울 원정, 2015년 2부리그 우승을 앞둔 마지막 부천전과 같은 실패에 좌절할지도 모른다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번엔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포기하거나 어느정도 타협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결연한 의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굳어졌다. 함께 응원하던 사람들과 역사를 함께 쓰겠다던 다짐이 있었고, 여태 이루지 못한 챔피언에 대한 열망은 그 어떤 팀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2018년 12월 5일. 전날 밤부터 잠이 들지 않았다. 감출 수 없는 긴장과 설레임 탓에 커피 한 모금 마시지 않아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날 아침까지 나는 기대감인지 우울감인지 모를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 그 탓에 울산에서 돌아오는 길을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함께 축구를 응원했던 형님들 차에 몸을 싣고 다 같이 울산으로 향했다. 패배와 실패가 익숙한 만큼 패배와 실패가 두려웠다. 대구를 응원하는 순간부터 수많은 실패를 맛봤더라도 그것에 익숙해질 순 없었다. 오히려 이번에 겪을 실패는 다시 해보겠다는 다짐조차 소멸시키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명분이 될 것만 같았다.

 

함께 차에 있던 모두가 마냥 설레는 마음만은 아니었던 것일까, 울산으로 향하는 두 시간 동안 수다와 고요가 반복됐다. 수다 속에선 희망이, 고요 속에선 불안이 느껴졌다. 문수IC를 지나는 순간부터는 급속도로 대화가 잦아들었다. 순간 어린 시절 원정 경기를 보러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열정이며, 혈기가 지금보다 훨씬 왕성했던 시절 원정 경기장 근처 IC를 통과하면 심장 박동이 몇배는 더 치솟아 오르는 것만 같았다. 오랜 원정 끝에 적진에 들어서서 전투를 맞이하던 병사들의 떨림이 그와 같지 않았을까.

 

문수 경기장에 도착한 뒤 오랜만에 과거 도미네이터 사람들을 다수 만났다. 함께 응원했던 형, 동생, 친구들을 만나자 기분이 조금은 풀어졌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결승이라는 낯선 풍경에 대해 다양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원정석에 들어서자 엔젤클럽과 그라지예 그리고 우리 같은 개인 원정팬이 문수 원정석을 두 섹터나 가득 채웠다. 결승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잠시 2층에 올라가 걸개를 걸기 시작했다. 원정석 섹터를 넘어가는 길이 탓에 울산측 보안업체 직원이 걸개 철거를 요구했다. 평소 같았다면 걸지 않고 내려왔을 것을 그 날만큼은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어느 하나라도 지고 싶지 않았다. 실랑이 끝에 구단 직원, 울산 구단 직원과 이야기를 거쳐 모든 걸개를 걸었다. 그만큼 우리는 절실했고, 털끝 하나라도 지고 싶지 않았다.

 

휘슬이 울리고 우리는 수년간 참아왔던 갈증을 채우려는 듯 격하게 응원을 시작했다. 수년 전 응원을 그만둔 동생들도, 이제 더 이상 골대 뒤를 찾지 않는 형들도 다 함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뛰었다. 도미네이터의 깃발이 다시 휘날리고, 응원을 즐기는 사람들, 응원을 즐기지 않던 사람들, 응원을 모르는 사람들에 상관없이 단 하나의 순수한 목표와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경기를 펼쳤다. 우린 오래 전 어두운 시기의 골대 뒤처럼 사납고 뜨겁게 응원했다. 패배와 비리에 점철된 구단을 지키기 위해 욕설과 발악으로 응원하던 그 때처럼. 끝없는 패배로 꼴찌를 기록하던 그 해 모든 걸 내려놓고 한풀이하듯 응원하던 시민운동장에서의 그 날처럼. 그 날 우린 축구를 본다기 보단 처음 숨겨진 욕망을 내보인 그 짜릿함에 중독된 사람처럼 거칠 것 없이 모든 것을 토해내기만 하고 있었다.

 

정신없던 응원의 시간이 지나 후반이 시작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첫 골이 터졌다. 울산이 아닌 우리 골대에서. 아! 하는 탄식이 세어 나왔다.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움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걸까. 우리의 자리는 여기가 아닌걸까. 대구에게 우승이란 감히 꿈꿀 수 없는 신분인걸까. 온갖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응원에 대한 집중력이 흐려지기도 전에 기회는 다시 한번 찾아왔다. 세징야의 동점골이 울산의 골문을 갈랐다. 원정석은 뒤집어졌고, 방금 전까지 환호에 가득 차있던 경기장의 3면은 침묵에 빠졌다. 몸이 떨리는 추운 겨울밤이었지만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반팔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 전에 마음먹었던 알 수 없는 자신감에 대한 해답을 찾고 나니 거칠 것이 없었다. 가슴이 뛰는 만큼 몸도 뜨거워졌다. 전에 없던 열정이 한가득 뿜어져 나왔다.

 

열정에 대한 보답은 머지 않은 시간 내에 또 다시 찾아왔다. 이번엔 에드가의 두 번째 골이었다. 피치 위의 선수와 우리 모두는 포효했고 믿지 못할 승리의 순간을 향해 간다는 생각에 목을 아끼지 않으며 소리 질렀다.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 마치 마약을 투약한 사람들과 같았다. 추위와 체력적인 한계를 무시한 채 막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난적이었던 울산을 상대로 우리는 태양과 같이 뜨겁게 승리하고 있었다. 패배의식과 결여된 도전정신은 이 순간을 기점으로 우리에게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아니, 우리라서 할 수 있다.

 

광란의 90분이 지나고 스코어는 그대로 우리가 앞선 채로 경기가 종료되었다. 적어도 오늘은 실패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렸다. 다리가 저리고 발목이 뜨끈하게 아파왔다. 응원을 하며 흘리던 땀이 식자 그제서야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시간에 다가오자 현실에 대한 자각이 흐려졌다. 이번에도 머리를 부여잡은 모습은 실점 때와 같았지만 대신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피식 세어 나왔다. 우린 그 날 시즌 중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팀을 상대로 원정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강력한 스쿼드의 울산을 상대로 신인급 선수들과 새롭게 영입된 외국인 선수로 구성된 대구는 밀리지 않는 싸움을 걸었고, 승리를 차지했다. 심지어 FA컵 결승이라는 구단 역사에 획을 그을 경기에서 승리를 챙겼다. 이제 우리는 실패라는 답습과 자침에서 벗어나 왕좌를 향한 진지한 도전자가 되었다.

 

 

3편을 이제서야 올립니다.

FA컵 1차전은 지금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순간이었죠.

기억조차 나지 않는 흥분감에 휩싸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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