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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연재글. 그 겨울의 탄생 #4

AzureL'ete title: 작가콘AzureL'ete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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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차전이 열린 대구는 울산보다 더 추웠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얼어붙을 것 같은 겨울이었다. 마지막 경기라 함은 과거 대구에겐 늘 인기 없었던 경기였지만 올해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마지막을 보기 위해 대구 스타디움 앞에 개막전처럼 줄을 섰다. 여태껏 가변석에 머무르던 그라지예는 드디어 N석으로 올라왔다. 결승 진출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러웠지만 내친 김에 우승을 해보겠다는 열의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에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창단 시절에 얼굴을 익혔던 팬들도 나이를 먹고 다시 경기장을 찾았다. 그 순간을 바라보면서 속에 있던 과거의 감정은 비워지고 무언가 다른 감정의 숨결이 온 몸을 휘감았다.

 

“ROAD TO ASIA”

 

그 날 경기장에 내걸린 거대한 통천의 문구였다. 대구FC를 상징하는 하늘색 캐릭터인 스머프들이 비행기를 타며 아시아챔피언스리그가 열리는 아시아로가겠다는 의미를 담은 통천이었다. 함께 응원하던 친구의 사비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비록 경기에 오지 못했지만 그의 마음은 누구보다 크게 경기장을 채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문구를 보며 우승을 향한 마음을 굳게 먹었을 것이다. 나 역시 거대한 통천에 적힌 문구를 보며 선수들 못지 않게 의지를 불태웠다.

 

그 날 역시도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 함께 응원했다. 더 많은 팬들이 더 큰 감정으로 울산에서 보다 더 우렁찬 목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우리에겐 오로지 우승뿐이었다. 과거가 어떻든,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되든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날 90분의 결과가 우승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미 대구FC 경기에 익숙해져 가던 나 역시도 축구 인생에 있어 가장 집중력 있게 경기를 지켜본 날이었다. 마치 2003년 처음 응원을 즐기던 해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생소하면서도 일상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수백, 수천명에게서 발산되는 곳. 축구장에서의 응원이 주는 매력이 어떤 것인 지 처음으로 느꼈던 중학생의 내가 그 곳에 있었다. 축구장을 가는 것만으로도 주말이 기다려지고 벅차오르던 그 순간, 응원가 하나 하나가 즐겁고 골대 뒤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만나는 것이 가장 깊은 취미였던 그 때가 떠올랐다. 대구를 응원하는 것에 대해 후회와 아픔이 더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도시, 나의 클럽을 포기하지 못한 채 응원할 수밖에 없던 운명의 고리를 손에 꼭 쥔 채 골대 뒤를 우두커니 지키던 하나, 하나의 경기들. 2018년의 결승전은 구단 역사에 있어 중요한 승부의 시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구를 응원하던 팬들에게 주는 보상의 시간이기도 했다.

 

FA컵 결승전이 펼쳐지던 그 해 울산과 대구, 두 도시에서는 가냘프기 그지없는 양 팀의 간절함과 곧 폭발할 것만 같은 위태로운 예민함, 하얗게 기화하는 뜨거운 응원과 그 해 겨울 추위만큼이나 차가운 탄식이 가득했다. N석 머리 위로 깃발과 꽃가루가 새하얀 눈꽃처럼 휘날리던 그 날,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될 것만 같았지만 대구는 그런 우리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강한 모습을 보였다. 패배하리라는 불안보다는 우승할 것이라는 다짐이 더 커져 있었다.

 

울산에서의 첫 경기는 대구가 지니고 있던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었다. 패배와 절망이라는 전철을 답습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선제골에 그대로 침몰하지 않고 기어코 역전을 이뤄내는 끈질긴 시험을 우린 힘겹게 치뤄냈다. 그렇게 문수에서 답답한 벽을 깨부수고 나온 우리는 홈에서 더욱 거칠 것이 없었다. 경기가 시작된 후의 2차전은 아슬아슬한 사투라기 보단 우승을 뜻깊게 이뤄내는 축제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는 김대원의 자신감 넘치는 슈팅이 골문을 가르면서 더욱 무르익었다. 선수들은 당연히 득점할 것이라 생각이라도 한 듯 첫 골이 터지자 함께 모여 춤을 추며 골을 자축했고 우리 역시 추위를 잊으며 그 순간을 기뻐했다.

 

세징야의 역습, 에드가의 돌파력으로 한 골, 한 골이 더해지면서 축제는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우승은 희망이라는 어렴풋한 추상을 지나 현실이라는 선명한 역사에 가까워졌다. 우린 이제 더 이상 약하지 않다. 이제 더 이상 패배와 실패, 어두움이라는 단어에 가깝지 않다.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한 희망을 꿈꾸지 않는다. 이런 생각들이 뇌리에 박혔다. 대구FC라는 클럽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평생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광경이 그 해 겨울에 찾아왔다. 약팀이라는 오명 속에, 강등이라는 좌절 속에서도 꾸준히 클럽을 응원해온 인생 전체를 하루 아침에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난 이 순간을 꽃이 피는 것과 같다고 느꼈던 것 같다. 혹독한 겨울과 질척한 여름을 지나 오랫동안 꽃을 품으며 언젠가 피어나길 기다리던 푸른 잎의 순간을 우리 모두는 겪어냈다. 대구라는 클럽 역시 그런 고행을 해왔던 것이 아닐까. 2018년의 마지막 달에 우린 기어코 꽃망울을 터뜨릴 수 밖에 없는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인생에도 언젠가 빛을 발하는 순간에 도달하듯 우리 역시 그러한 날에 도달했다. 꽃은 한번 봉우리를 피우자 겉잡을 수 없이 환하게 색을 드러냈다. 거침 없었고, 앞으로의 고난에 의연해졌다. 생명이 태어날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가장 추운 순간 가장 뜨겁게 생동하며 그 어떤 꽃보다 화려하게 봉우리를 틔우는 이 역설은 마치 억지로 끼워 맞춘 옷을 입고 가난과 약체라는 별명을 피할 수 없었던 대구라는 팀이 결국엔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 클럽 자리에 오르는 그 해의 스토리를 완벽하게 은유하는 것이었다.

 

경기가 종료되고 어릴 때처럼 경기장에서 펑펑 목을 놓아 울었다. 다만 어릴 적 눈물은 한스러움과 분노가 근원이었다면 이 때의 눈물은 성취와 기쁨이 근원이었다. 트로피가 우리 품에 안기는 모습을 눈 앞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은 직접 경기를 뛴 선수들 못지 않게 감격스러웠다. 아시아챔피언스리그라는 생소함마저 느껴지는 대회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믿기 힘든 보상이었다. 항상 좌절과 패배 앞에 눈물 흘리던 과거를 뒤로 하고 이제 승리와 환희라는 단어를 명확히 직시하며 눈물 흘렸다. 승격이라는 작은 성공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FA컵 챔피언이라는 큰 성공을 얻은 그 순간의 환희는 한겨울 한기보다 더 얼얼하고 짜릿했다.

 

우승이라는 결과를 손에 들고서 우린 추위도 잊은 채 뛰어놀며 대구스타디움에서의 마지막을 기념했다. ROAD TO ASIA 통천은 마치 거대한 학의 날개처럼 피치에 스르륵 내려앉았다. 가까이 갈 수 없었던 피치 위에 관중들이 함께 들어섰고, 최악의 여름을 보내고 최고의 겨울을 선사한 선수들이 함께 어우러졌다. 꿈에서나 볼 수 있던 우승 트로피는 영롱한 자태를 뽐내며 우리 손에 들려졌다. 과거 우리가 먼발치에서나 흐릿하게 지켜보던 장면이 이젠 선명하게 눈 앞에 펼쳐졌다. 이제 우린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허울뿐인 주장이 아니라 우리 힘으로 그것을 입증해냈다. 강팀을 향한 오랜 숙념. 내 고향의 이름을 대표하며 뛰는 클럽이 실력으로도 뛰어나길 바랬던 우리의 마음이 한 단계 이루어졌다. 오랜 인고의 역사를 겪은 대구스타디움 생활을 마치고 우승컵과 함께 새로운 전용구장으로 떠나는 제1막의 마무리로서 그 무엇보다 완벽한 결말이었다.

 

2012년 10주년을 맞아 당시 서포터들의 요청으로 팀 컬러가 하늘빛으로 바뀐 후 우린 줄곧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피치 위에서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더 높은 곳을 꿈꾸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약팀이라는 오명을 벗어던지기 위해 우린 부던히도 노력했고, 강한 골대 뒤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했다. 남들의 평가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 16년차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지금 우린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간다. 엠블럼의 중심에 자리 잡은 태양의 보금자리인 하늘, 세상에서 가장 높은 그 곳을 가로질러 꿈을 향해 가는 출발선에 겨우 섰다. 이 시작을 위한 모든 괴로움과 고통은 곧 있을 질주를 위한 오랜 숙성이었던 셈이다. 좁은 한국을 넘어 더 넓은 아시아로 향하는 국제선 티켓을 손에 쥔 채 설레임을 느끼며 더 큰 우승과 명예를 향한 수속을 마쳤다.

 

본편 끝.

 

본편을 드디어 끝냈습니다. 시간이 부족해서 글이 쏙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글을 쓰다보니 여러 서포터 활동을 하면서 겪은 이야기들을 책으로 내볼까하는 생각도 드네요.

끝으로 응원가 그 겨울이 만들어졌던 과정을 담은 글도 번외편으로 곧 올라올 예정이니 많관부~

 

https://daegusto.me/free_board/1563241 - 그 겨울의 탄생 #1

https://daegusto.me/free_board/1586928 - 그 겨울의 탄생 #2

https://daegusto.me/free_board/1605266 - 그 겨울의 탄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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